201810. 대한건축학회지_내가읽은 책. 건축가와 소설가
 

설계 일을 업으로 삼고는 있지만 ‘건축가’란 직업 자체에 대한 고민과 질문은 여전하다. 그것은 건축가가 다루는 대상인 건축에 대한 고민에서 출발하기도 하고, 건축가의 업역(業域)이 어디까지인가에 대한 질문일 때도 있고, 나아가 건축가란 직업이 가지는 고유한 특성과 한계에 대한 생각들을 포함한다.
그렇다보니 창작 작업을 하는 다른 분야를 엿볼 기회가 생길 때면, 본능적으로 주의를 기울여 건축과 겹쳐놓으며 유사와 차이를 찾고, 각 분야에 따른 특별한 점을 확인하곤 한다. 이를 통해 건축과 건축가의 위치를 새롭게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설가 김연수의 산문집, <소설가의 일>은 작가의 쓰는 행위에 대한 일상적 고찰과 그 결과로서의 소설이라는 형식에 대해 소설가 스스로가 쓴 글이다. 이 책을 읽는 중에 비슷한 소재의 다른 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김연수의 책을 마치고 연이어 그것들도 찾아 읽어 보았다. 김연수 책에도 언급된 오르한 파묵의 <소설과 소설가>와, 김연수 책보다 나중에 출간되었지만 비슷한 내용을 다룬 또 다른 책, 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가 그것이다. 처음에는 동시대를 대표하는 동서양 작가들이 비슷한 시기에 유사한 소재로 책을 펴낸 것에 대한 단순한 흥미가 책장을 넘겼으나, 읽으면서는 세 작가 각각의 독특한 개성을 발견하는 즐거움도 있었다.

기본적으로 소설은 허구, 즉 작가가 상상을 토대로 지어낸 이야기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비록 작가가 만들어낸 이야기는 가짜이지만, 독자에게는 가장 진실처럼 들려야 한다는 것이다. 김연수는 이 점에서 개연성을 넘은 핍진성을 말한다. 핍진성(逼眞性), 꽤 어려운 단어인데, 사전을 찾으니 사정이나 표현이 진실하고 거짓이 없는 것을 뜻한다고 한다. 작가가 핍진성을 제대로 이해해야, 바로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고 인과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않는 글을 쓸 수 있다.
글을 읽으며 단박에 핍진성을 건축에 가져다 놓았다. 설계는 공간을 사용하는 여러 상황에 대한 상상에서 시작되지만, 그것이 마침내 단단하고 무거운 벽으로 땅에 서기 위해서는 나름의 절박한 요구가 있어야 한다. 진실하고 거짓 없는 핍진한 조건이 아니라면, 건축은 작동하지 않고 이내 소멸하고 만다.
오르한 파묵 또한, 소설의 이 ‘진짜 같음’에 대해 고찰한다. 우리는 왜 소설을 읽는가. 데카르트가 세운 하나의 세계관을 뛰어넘기 위해, 소설을 통하여 동시에 여러 가지의 세계를 만드는 것이고, 실재와 상상을 혼동하기 위해 소설을 읽는다는 것이다. 그는 삶보다 더 진짜 같은 소설을 읽고 쓰는 일은 삶의 가장 기본적 특징들과 관련된 ‘감춰진 중심부-진짜 주제’를 탐색하는 작업이라고 말한다.
이상적인 설계와 현실적인 구축이라는 양극단을 넘나들어야 하는 건축 작업은 태생부터가 ‘중심부’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중심부가 너무 명확하게 드러나면 지루해지고, 결국 중심부의 힘은 그것이 무엇인가에 달려 있지 않고 독자들이 찾아 나서게 하는 데 있다는 파묵의 말은 좋은 교훈이 된다.

소설에는 이야기를 구성하는 캐릭터와 플롯 외에, 이야기를 들려주는 작가의 고유한 방식, 즉 문체(style)가 있다. 같은 내용이라 하더라도 작가마다 어떻게 다른 느낌으로 전달하는 지에 따라 작가의 개성이 발현되고, 글의 결(texture)이 결정된다. 바로 무라카미 하루키가 작가의 “자유롭고 내추럴한 감각”인 오리지낼리티에 대해 말하는 지점이다. 그의 경험담이 흥미로웠다. 우연히 영어 글쓰기를 시도하고 그것을 다시 번역하면서 어떤 특징적인 성격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외국어 장벽이 쉬운 단어들의 짧은 조합으로 간단한 문장을 만들게 하고, 그것의 번역 과정을 통해 특유의 리듬감, 솔직함, 거리감을 찾았다는 것이다. 이런 계기로 하루키 자신의 약간은 냉소적이고 관찰자적인 문체가 생겨난 것일까.
건축가가 작업에서 자신만의 고유한 뉘앙스를 지니게 되기까지는 제법 많은 시간을 요한다. 김연수는 화가가 풍부한 표현을 하기 위해 여러 색채를 알아야 하듯이, 소설가도 사전 편집자 수준으로 단어를 수집한다고 적었다. 견주어 건축가가 자신의 문체를 표현하기 위해 지녀야할 팔레트와 단어장은 무엇일까. 나아가 그것들의 ‘세밀한 차이’를 정확하게 구분하여 표현해낼 수 있는가.
파묵은 프리드리히 쉴러의 논문, <소박한(naive) 문학과 성찰적인(sentimentalisch) 문학>을 인용하여 작가의 성향을 두 부류로 구분한다. 그렇다면 과연 나는 소박한 건축가인가, 성찰적인 건축가인가.

소설과 소설가에 대해 썼으니, 소개하는 세 권의 책은 굳이 말하자면 작법론 쯤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으나, 담은 내용은 그것을 넘어선다. 단순히 소설 ‘쓰기’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삶에 대한 통찰, 삶의 태도에 대한 이야기로 읽었다.
총을 들고 있으면 군인, 공을 차고 있다면 축구선수 이지만, 소설가는 그저 쓰고 쓰고 또 쓰고, 그리고 고치고 고치고 또 고치는 사람이니, 작가에게 중요한 건 오직 동사 ‘쓴다’일 뿐이라는 구절에 공감했다. 달리기 이론처럼, 우리는 가장 느리게 달릴 때 매일 달릴 수 있고, 매일 달릴 때 가장 많은 거리를 달릴 수 있다. 갑자기 찾아오는 번뜩이는 영감이나 몰아치는 밤샘의 집중력 보다는, 매일 아침마다 규칙적으로 책상에 앉는 꾸준함으로 한 사람의 작가가 완성된다.
하여, 김연수의 말을 빌려 해보자면, 그럼에도 계속 써야 한다. 건축가든 소설가든 멋진 작업을 꿈꾸는 작가여, 매일 그걸 해라. 오래도록 느리게 늘 꾸준히. 조금씩 매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