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1. 아름다운보금자리, 국립중앙박물관. 서가에서 길을 찾다

 

도시의 박물관은 유물소장의 기능을 넘어 생활 속 공원이자 광장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용산에 새로 들어선 국립중앙박물관은 도시 안이란 느낌보다는 도시 밖 어디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박물관이 이사한지 꽤 되었는데, 좀처럼 그쪽으로 발길이 닿질 않았다. 하지만 맑은 가을날 아침 찾아간 박물관 한 켠의 작은 서점은 그러한 내 선입견을 깨주었다. 둘러보기에 너무 크지 않은 서가는 아담하여 편안했고, 진열된 책과 전시 도록들은 마치 이곳이 바로 작은 박물관이라는 듯 자신의 깊이를 은밀히 드러내고 있었다. 서가 이쪽 저쪽을 몇 번이고 오가다가 책 두 권을 품에 안았다.

추사 김정희, 학예 일치의 경지, 국립중앙박물관 편, 2006
추사 김정희(1786-1856). 추사체로 유명한 그에 대해 나는 많은 것을 알지 못한다. 그저 예전에 보았던 <세한도>와 <불이선란도>를 찬찬히 다시 만나는 즐거움으로 이 도록을 집어 들었다. 2006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전시 내용을 담은 이 도록은 김정희가 살아 생전 친지들과 주고 받은 편지를 포함하여 그의 서예와 탁본, 시화 등을 모아 놓았다. 그래서 추사가 낯선 이들에게도 그의 삶에 있어서의 학문적 교류나 예술적 영향관계, 또 시대에 따른 변화를 가늠케 한다.
서예와 수묵화의 매력은 ‘면’이 아니라 ‘선’의 강약과 여백 만으로 만들어 내는 그림의 풍부함을 발견하는 것이리라. 서양 회화의 표현법에 길들여질 데로 길들여진 나의 눈에는 무엇보다 먹의 농담과 붓끝 놀림의 빠르기 조절 만으로 공간에 긴장감을 불어넣고 여백의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는 것이 새삼 신선하고 놀랍게 다가온다.
<세한도>를 처음 본 것은 학창시절 교과서에서다. 그때는 단선으로 묘사된 이 그림이 너무나 허술하고 어설프게 보였다. 하지만 세월과 함께 나는 세한도를 점점 이해하기 시작한 듯 하다. 몇 그루의 마른 나무들과 극히 단순한 몇 개의 선으로 그은 집의 모습은 소박하다 못해 자못 유치하다. 하지만 바로 그 유치함을 불쑥 드러내는 당당함에 세한도가 가지는 힘이 있다. 붓끝 물기를 다 빼고 바짝 마르게 그린 선은 또한 한겨울의 매서운 바람처럼 까칠하고 건조해서, 유배시절 추사의 감성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 하다.
책장을 넘기니 <불이선란도>가 바로 따라 나온다. 힘찬 난초 줄기가 화폭의 여백을 대담하게 가로지른다. 끊길 듯 꺽인 난초잎의 방향에 눈길이 간다. 평범해 보이지 않는 난초 줄기와 글씨의 배치, 그리고 이곳 저곳 자유롭게 찍혀있는 인관들이 묘하게 균형을 이룬다. ‘문자향, 서권기’. 말 그대로 학문과 예술은 그리 다른 모습이 아닌 것 같다.
책을 찬찬히 다 보았다. 하지만 아직도 추사체가 어떠한 글씨인지 김정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정확하게 말하지는 못하겠다. 하지만 그의 그림과 글씨에서 정형에 구속되지 않는 자유분방함과 공간의 강약을 이끌어가는 능숙 능란함을 보았다. 그리고 가끔씩은 내 서가에 꽂힌 이 도록을 다시 들추면서 그 자유로운 소박함을 한 수 배우고 싶은 마음이다.

동궐도, 글 한영우, 사진 김대벽, 영역 김진숙, 효형출판, 2007
<동궐도>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그린 가로 5.84m 세로 2.73m의 대형 그림이다. 열여섯 폭 비단에 조선 순조(1790-1834)때의 궁궐 모습을 한 획 한 획 세밀하게 담아내었다.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무엇보다 궁궐의 모든 건물을 투상도 방식(axonometric)으로 그린 점이 아주 흥미롭다. 그러니까 동궐도는 당대의 이른바 건축도면이 아닌가 말이다. 게다가 동궐도는 건물 묘사에만 그치지 않고, 건물 주변의 조경까지도 수종 별로 구분해 정밀히 표현하고 있다. 542채 전각과 겹겹이 겹쳐진 담장들 사이사이로 꽃과 나무, 괴석과 연못이 펼쳐지고, 적색 녹색 황색 등 다양한 천연 색채가 단청과 꽃나무를 담으며, 화폭을 더욱 정교하게 때론 화려하게 만들어준다.
책 동궐도는 이 그림을 김대벽의 사진과 한영우의 글로 옮겨왔다. 한 손에 딱 들어오는 책의 크기도 정겹고, 칼라 인쇄이지만 광택 없는 종이를 사용하여 요란떨지 않는 작고 예쁜 책이 되었다. 페이지마다 <동궐도>의 부분 사진과 함께, 건물명칭과 공간에 대한 설명이 곁들여진다. 특히 한글 설명과 나란히 영문으로도 병기해놓아 외국 친구에게 선물하기에 좋을 것 같다.
연경당, 낙선재, 부용정과 옥류천,… 책을 한장 한장 넘기다 보니 어느덧 지금의 창덕궁과 창경궁 모습이 겹쳐지면서 다시금 그곳에 서서 옛 자취를 더듬어 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그곳에 서면 실제 동궐과 그림 동궐도, 그리고 책 동궐도의 유사와 차이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가을 단풍으로 그 색채가 더욱 고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