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10. 공간. 건축전시회, 건축대중화를 위한 장치
 

올 여름 뉴욕의 미술관들은 건축열기로 뜨겁다. 세개의 건축 전시회가 거의 동시에 주요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기 때문이다. MoMA와 휘트니미술관에서 나란히 열리고 있는 ‘Mies in Berlin’(6/21-9/11), ‘Mies in America’ (6/21-9/23), 그리고 구겐하임미술관의 ‘Frank Gehry Architect’ (5/18-8/26) 전시회가 그것이다.
갑자기 왜 미스인가? 혹은 왜 게리인가? 아니 왜 하필 건축전시회인가? 이들 전시회는 여러가지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어떻게 이들 전시회가 기획되고 만들어졌는지, 건물이 아닌 전시물로서 건축은 무엇을, 어떻게 보여줄 수 있는지, 무엇이 이 전시회들을 블럭버스터로 만드는지 살펴보았다. 연일 장사진을 이루는 이들 전시를 통해 우리의 건축 미술계를 질문하고자 한다. 우리의 건축은 왜 대중과 대화하지 못하는지, 우리의 미술관은 왜 건축과 멀리 있는지 묻고자 한다.

이곳의 미술관들이 순수미술로 국한되지 않고 기타 제반 예술로 전시의 폭을 넓히기 시작한 것은 역사가 그리 짧은 이야기는 아니다. 구겐하임미술관의 ‘Giorgio Armani전’과 ‘Motorcycle전’,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의 ‘Gianni Versace전’ 등 다양한 패션, 인더스트리얼 디자인 전시회가 이미 성황리에 개최된 바 있다. 주요 미술관들은 오래전부터 건축과 디자인 부서를 따로 운영하고있고, 그 부서에서 자체적으로 건축과 디자인 관련 전시기획은 물론, 연구와 작품 수집을 해오고 있다. 또한 디자인 전문 미술관인 쿠퍼 휴이트 뮤지움은 차치하더라도, 각 미술관들이 독립된 건축과 디자인 상설전시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특히 미술관의 전시, 수집의 대상이 근현대 미술인 경우, 디자인과 건축은 순수미술과 동등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디자인은 모던니티의 기본개념이다. 모던 아트 혹은 컨템포러리 아트를 이해함에 있어 디자인과 동떨어져 생각할 수 없다. 그렇게 볼때, 미술관의 건축이나 디자인 관련 전시회로의 방향전환은 근, 현대 미술을 제대로 조명하기위한 필연적 선택일 것이다.

건축전시회는 순수미술전시회와는 다르게 기획되어야 한다. 미술전시가 미술품 그 자체를 전시하는 것에 비해, 건축전시는 대지에 지어진 실제의 건축물이 아니라 제 3의 전시물을 통해서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매개체로 이루어지는 간접적 전달이다. 그렇기 때문에 건축물 자체를 어떻게 정의내리고,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전시의 아이템은 다양해 질 수 있다. 여기서 기획자는 두가지를 분명히 하여야 하겠다. 첫째 가장 기본적 질문, 건축의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와, 둘째 직접적으로 전시장에서 무엇을 전시할 것인가의 문제다. 뉴욕에서 열리고 있는 세 건축전의 경우, 각 전시회가 서로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구겐하임의 게리는 작가 작업의 프로세스 자체를 보여주고 있고, MoMA의 미스는 건축의 도시적, 역사적 관계를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휘트니의 경우는 건축 공간을 미학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구겐하임의 전시는 게리가 당대 활동 중인 건축가인 만큼, 건축가의 현재성에 촛점을 맞춘 전시이다. 초기의 주택 시리즈에서 최근의 뉴욕타임즈 사옥 공모전 출품작 까지 40개에 가까운 작품이 망라되었다. 그중에서 무엇보다 눈에 띄는 작품은 다운타운 뉴욕의 또다른 구겐하임 미술관이다. 지금 구겐하임 미술관의 10배가 되는 건물 규모와 7억 달러 예산의 이 건물은 지난 1월 뉴욕시로 부터 허가를 받은 바 있다. 전시된 각 작품마다 작가와 스탶들의 작업과정을 다양한 시각에서 보여주기위해, 수많은 스터디 모델과 스케치, 컴퓨터 시뮬레이션, 공사현장을 시간대별로 녹화한 비디오 테잎, 건물사진, 실제 설계도면 등이 전시되었다. 물고기와 말머리를 이용한 형태의 단계별 진화과정과 컴퓨터 모델링을 통해 형태를 찾아 나가는 과정이 건축가의 초기 작업을 잘 다큐멘트 했다면, 그 형태의 난해함을 시공현장에 이해 시키기 위한 3차원의 액소노메트릭을 포함하고 있는 시공도면과 디테일, 철골 구조 시공 현장을 담은 사진과 비디오 등은 종이 위의 그림이 어떻게 실제 현장에서 실현되는지를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겠다. 또한, 게리는 이번 전시회를 위해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설계한 구겐하임 미술관의 로툰다에 메탈 메쉬를 늘어뜨린 설치작업을 선보였다. 로툰다 공간을 휘감는 금속의 메쉬 커텐이 주는 거친 느낌은 작업의 현재성을 보여준 전시장 분위기와 잘 맞아 떨어졌다. 전시 매개체의 다양함과 그 양의 방대함은 다소 다듬어지지 않은 듯이 작업과정의 뜨거움을 보여주었고, 이는 마치 관람객으로 하여금 작업실을 방문한 듯한 느낌을 주었다. 이번 전시의 기획 의도가 다운타운 구겐하임을 위한 예산의 확보라는 비평도 일지만, 건축을 완성된 건축물로 읽지 않고 디자인 작업 프로세스의 단면을 드러낸 큐레이터, Mildred Friedman의 기획력은 건축 관련 분야 사람들 외에도 일반 관람객들의 발길을 끊이질 않게 하고 있다.
두번째로 MoMA의 ‘Mies in Berlin’은 미스를 역사적 관점 혹은 도시적 관점에서 분석하여 균형잡힌 시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전시회는 MoMA의 수석 큐레이터인 Terence Riley와 콜럼비아 대학의 건축 역사 학자인 Barry Bergdoll과의 공동작업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전시회의 제목답게 베를린 이라는 도시구조를 보여주고 그 속에서 건축물을 이해하려 한 점이나 랜드스케이프의 모델을 통해 건물 자체 만이 아니라 주변 환경을 함께 보여준 점이 돋보였다. 또한 신고전주의자 Karl Friedrich Schinkel로부터의 영향을 비롯, Hans Richter 등 다른 예술가와의 교류, 예술잡지 ‘G’ 활동 등, 전시된 작품 하나 하나 사이의 연대기적 영향 관계나 이론적, 사상적 흐름이 잘 읽혀지는 전시였다. 그러나, 리서치가 강조되다 보니 시각적으로는 다소 건조한 전시회였다. 바르셀로나 파빌리온의 효과를 재현해 보려는 비디오 상영실의 작은 노력을 제외한다면, 단순한 드로잉과 모형들의 전시로 그쳤다. 미스가 생전에 이야기한 데로 전시장이 새로운 건축적 세팅일 수 있는 점을 놓친 아쉬움이 남는다.
반면, 휘트니의 ‘Mies in America’는 시각적 즐거움을 선사한 쇼였다. 추상 예술로서의 건축, 미학적 오브제로써의 건축을 이해하고, 작품의 선정과 전시 공간의 연출을 재현하였다. 100여개의 미스 작품 중에서 몇몇의 미니멀한 드로잉과 개념 꼴라쥬, 디테일 사진 등만이 선별되었다. 빨간 그리드 전시 테이블과 전시 벽들의 공간 배열들은 전시장내의 관람객들의 움직임을 리드하면서 전시물 자체의 현상학적 감상을 이끌어내었다. 무엇보다도 전시장 한가운데에 매달린 스크린을 통해 보여진 필름은 인상적이었다. 시그램 빌딩과 베를린의 내쇼널 갤러리 등을 촬영한 이들 작품은 시카고 출신의 비디오 아티스트인 Inigo Manglano-Ovalle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는 2년전 휘트니 비엔날레에 미스의 Farnsworth주택을 무대로한 비디오 작품을 출품해 이번 전시의 큐레이터인 Phyllis Lambert의 눈에 띄었다고 한다. 그는 판스워드의 비디오 작품에서 건축가 미스와 클라이언트 Ms. Farnsworth의 관계를 희화한 듯한, 유리창 바깥쪽에서 젖은 유리창을 닦는 청소부와 유리창 안쪽에서 음악을 트는 DJ의 팽팽한 긴장관계를 보여준 바 있다. 이번에 소개된 필름들은 잔잔한 뉴에이지 음악과 철저하게 짜여진 choreography를 바탕으로 일상과 환영을 넘나드는 미스의 공간을 보여주었다. 휘트니의 전시가 MoMA나 구겐하임의 전시와 차별화 되는 것은, 드로잉이나 꼴라쥬, 모델 혹은 사진, 필름 등이 건축의 부산물로서가 아니라 미학적 오브제 자체로서 취급된 점이다. 시각적으로 풍부한 매개체를 통해 미스 건축공간이 가진 미학적 접근을 간접적으로 재시도하고 있다.
건축전시의 관건은 전시물로 그것이 설명하는 건축의 질을 얼만큼 보여줄 수 있느냐는 것이다. 다시말해, 전시를 통해 건축물을 직접 가보았을 때의 느껴지는 아우라를 어떻게 끌어낼 것인가 이다. 대화 도구인 매개체와 그것을 통해 보여주려는 것, 이 두가지가 논리적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그러기위해, 매개체로서의 전시물 자체도 시각적 효과와 장치를 가지고 있어야 함은 물론이고, 그 전시된 오브제의 시각적 장치를 통해 무엇을 보여줄 지를 분명히 하여야 할 것이다. 그것이 작가의 프로세스이건, 도시적 역사적 관계이건, 아니면 미학적 측면이건 말이다.

우리는 90년대의 해체주의 열풍을 기억한다. 그 해체주의는 1988년 Philip JohnsonMark Wigley의 기획으로 MoMA에서 열린 ‘Deconstructivist Architecture’ 전시회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들이 다시 미스와 게리를 내세우고 있다. 해체 이후의 흐름이 네오 미니멀로서의 미스의 재등장과 Automatism적 게리의 작업, 두 양립된 흐름으로 정리될 지도 모른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은 새로운 디자인의 흐름을 읽어내고 그것을 다시 편성하고 있는 미술관의 위치이다. 미술관이 문화를 리드하고 있다. 작가와 호흡하며 대중을 흡수, 교육하고 있다. 미술관은 단지 전시를 하는 장소가 아니라 사회, 문화의 discipline을 이끄는 institute다. 뿐만아니라 미술관이 스스로 작가를 개발하고 있다. 쿠퍼후이트의 Design Award, MoMA와 연계된 갤러리인 P.S.1에서 매년 주최하는 Young Architects Program 등은 미술관 자체에서 젊은 디자이너와 건축가를 지원하기 위한 프로그램이다. 미술관이 자체적으로 신진 건축가를 찾고, 그들을 일반인에게 소개시키는 창구역할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일들을 하고 있는 미술관의 건축/디자인 큐레이터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우리가 이미 익히 들어 아는 유명한 이론가나 건축가들이다. 뉴욕 MoMA의 수석 큐레이터인 테렌스릴리나 6년동안 샌프란시스코 MoMA의 디렉터였던 Aaron Betsky, Peter Eisenman이 설계해서 유명해진 웩스터 시각예술센터의 큐레이터인 Jeffrey Kipnis 등은 이름난 건축이론가인 동시에 교수들이다. 게다가 휘트니는 얼마전 Michael Hays를 겸임 큐레이터로 선정했다. 또 휘트니는 Rem Koolhaas에게 미술관 전체의 프로그램 기획과 재조정을 의뢰했다. 건축가를 문화의 큐레이터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번 전시회의 뒤에도 건축문화의 흐름을 감지하고 있는 건축 전문 큐레이터들과 그들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는 이론가들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미스전의 경우 캐나다 건축 센터의 필리스람버트가 2년반 전 MoMA의 테렌스릴리를 방문해 그도 미스의 전시회를 준비하고 있는 것을 보고, 같이 전시회를 개최할 것을 설득했다고 한다. 그래서 MoMA와 캐나다 건축센터의 자매기관인 휘트니에서 동시에 열리게 되었고, 미스의 활동을 미국으로 건너오기 전과 후로 나누어 ‘Mies in Berlin’과 ‘Mies in America’란 제목으로 조명하게 된 것이다. 더불어, 전시회가 단순히 일회성으로 그치지 않도록 이론가들과 함께 그것을 비평, 토론하고, 그것의 영향을 다시 담론으로 만들어 가고 있다. 당연한 이야기일 수 있겠지만, 모든 전시회는 전시회의 오픈과 함께 그 연구 결과를 책으로 출판한다. 기록의 수단이 되기도 하고, 새로운 비평의 출발이기도 하다. 컬럼비아 대학에서 열린 심포지움, ‘Mies, In Effect’ 도 그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 될 수 있겠다. 하루종일 이어진 이 심포지움은 각 큐레이터들을 비롯, Anthony Vidler, Michael Hays, Rem Koolhaas 등 가장 영향력있는 건축가와 이론가, 예술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여러각도에서 미스의 영향을 현재의 시각으로 바라본 자리였다.

건축으로 대중과 이야기하고, 서로 다른 생각을 나누고, 그 다른 생각들을 문화적 힘으로 만들어가는 이들의 사회, 문화적 구조는 눈여겨 볼 만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이 그들과 다르기에 그러지 못하는가? 우리의 미술관은 딱딱하다. 우리에겐 작가가 없다. 건축을 이해하고 소개할 만한 큐레이터가 없다. 학교는 죽어있다. 아니 어쩌면, 우리도 그 모든걸 가졌는지도 모른다. 단지 그 서로가 연결되는 시스템이 없는 것이다. 전시 기획자와 비평가, Academia의 역량이 대중화, 생산화 되지 못하고 있다. 서로 그 틀 안에 갇혀있다. 우리는 대화를 시작하여야 한다. 작가의 작업이나 학교의 연구가 보다 넓게 소개되고, 비평 되어야 한다.
이들과 견줄만한 적극적인 미술관의 역할이 아쉽다. 우리의 미술관들도, 시대의 흐름을 받아들여 순수미술로 국한하지 말고, 건축 디자인 전문 부서를 만들어야 한다. 건축과 디자인 관련 혜안을 가진 전문가를 외부에서 흡수하고, 대중과 대화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여야 한다. 질 높은 작품의 선정과 배열, 전시공간에서의 효과 등을 위해 건축/디자인 전문 큐레이터의 개발은 필수적이다. 즉 연구자와 그것을 시각화할 만한 전시 기획자를 연결시켜야 한다. 전시의 내용의 다원화 뿐 아니라 미술관 운영자체의 유연성도 눈여겨 봄직하다. 뉴욕의 대부분의 미술관들이 금요일 밤의 연장 전시와 함께 pay what you wish (입장료를 없애고 내고 싶은만큼만 기부하는)와 재즈 컨서트 등으로 젊은이들의 발길을 자연스럽게 끌어들이고 있다. 대중에게 보다 가까이 가기 위한 미술관 자체의 노력이, 이미 주말이면 장사진을 이루는 이들 미술관을 잘 설명해준다.
즐길 수 있는 문화로서의 건축과 디자인을 생각한다. 나아가 사회적 담론을 만들어내는 건축과 디자인을 생각한다. 한때 포스트 모던 담론을 일게한 무라까미 하루끼의 소설이나, 신세대론을 등장시킨 서태지 음악을 생각해보자. 그들의 작업이 힘을 가지는 이유는 단지 소설이나 음악 그 자체로 그것이 그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비평과 그들의 작업에서 영향받은 다른 현상들로 재생산되기 때문일 것이다. 방향성있는 전시를 통해 새로운 목소리를 내고, 그것의 적극적 비평의 자리를 열어야한다. 글이나 음악에서 할 수 있는 이런 것들이 건축이나 디자인에서는 왜 아니되겠는가.